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덴노/생애 (문단 편집) === [[태평양 전쟁]] === [[1933년]] [[12월 23일]]에는 장남이자 훗날 [[천황]]이 되는 [[아키히토|쓰구노미야 아키히토]] 친왕이 태어났다. 이후 거듭되는 전쟁에서 전반에는 단숨에 동남아시아 전역을 점령하면서 승전보를 울렸지만 후반부터는 [[미국]]의 압도적 물량으로 인해, [[일본 제국]]은 결국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등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. 그 후 [[히로시마·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|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나서]] [[만주 전략 공세 작전|소련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대침공하자]], 쇼와 덴노는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군부의 쿠데타 시도([[궁성사건]])를 저지하고 밀어붙여서 "성단(聖斷)"이라는 명분하에 항복을 결정하고 [[1945년]] [[8월 15일]], 국민들에게 [[포츠담 선언]](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한다는 조건)의 수락을 통보하고 미래를 도모하자는 내용의 라디오 연설을 했는데 이를 '''[[옥음방송]]'''이라고 한다. 사실 일본 당국은 [[소련]]이나 [[스페인]], [[스위스]] 등을 통해 '''[[연합국]]과의 중재 강화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'''. 그래서 소련이 침공할 때까지.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 요구를 거부해왔던 것이다. [[1945년]] [[5월 8일]] [[나치 독일]]이 무조건 항복하자. [[스즈키 간타로 내각]]에서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[[포츠담 선언|연합국의 요구]]를 따라 쇼와 덴노에게 무조건 항복을 진언했고, 쇼와 덴노와 내각이 항복하려 하자 군부는 [[궁성사건]]을 일으켰으나 수포로 돌아간다. 같은해 11월 12일 육군과 해군 폐지에 따라 새로이 제정된 천황어복을 착용하고 이세신궁에 전쟁이 끝났음을 선조들에게 보고하고자 참배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